logo

기타자료실

자료실

한국기독교유적지 순례 안내3 (경상도,전라도.제주도)


6 장 경상도

 

39. 부산시(1)  한강 이남 최초인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일신여학교 건물, 일신기독병원

40. 부산시(2)  성공회 부산주교좌교회

41. 대구시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제일교회와 동산의료원 선교사주택

42. 경북 안동시 안동교회

43. 경북 영천시 자천교회

44. 경북 봉화군 척곡교회

45. 경북 울진군 행곡교회와 행장교회

46. 경남 창원시 주기철목사 기념관,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47. 경남 그 외의 지역(호주장로교 중심)

 

7 장 전라도

 

48. 전북 전주시 전주서문교회, 신흥학교, 엠마오 사랑병원

49. 전북 익산시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

50.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51. 전남 목포시 목포양동교회와 구 목포중앙교회 예배당(현재 오거리 문화센터)

52. 전남 순천시 순천선교부 유적

53. 전남 여수시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54. 광주시 광주선교부 유적지

55. 그밖의 유적지


제8장 제주도





6 장 경상도

 

1885.4.2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부산에 상륙해서 반나절을 보냈음, 1889.8 북감리교 아펜젤러, 존슨 목사가 부산 방문, 1890.4 호주장로교 데이비드 선교사가 부산 도착 후 하루 만에 죽음, 1891.9 북장로교 베어드목사 부산 부임, 1891.10 호주장로교 멕케이목사와 선교사 4명이 부산 부임,  1893.6 베어드목사 초량교회 설립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의 줄임 말로 고려 충숙왕 원년(1314) 부터 사용된 지명이다. 경주는 신라 1,000년의 왕도였고, 고려 시대에는 동경(東京)으로 불렸다. 상주는 경주와 함께 조선 초기 200년 동안 경상도 좌우 감영(도청 소재지)이 있던 곳이다.

 

  경상도를 다른 말로 영남지방으로 부른다. 영남()은 소백산맥 줄기인 죽령(689m)과 조령(548m) 두 영()아래라는 뜻이다.  

  경상도 선교는 장로교가 주도했다. 초기에는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가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했지만 1913년 이후 북장로는 경북과 대구, 호주 장로교는 경남과 부산으로 선교구역이 정리가 되었다. 장로교가 들어오기 전에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가 부산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선교활동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39. 부산시(1)  한강 이남에서 최초인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건물, 일신기독병원

 

1885.4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부산 상륙, 1890.4.5 호주 장로교 데이비드 선교사 순직, 1891.9 북장로교 베어드 선교사 부임, 1891.10 호주 장로교 멕케이목사와 4명의 선교사 부임, 1893.6.4 베어드목사가 초량교회 설립, 1895. 호주장로교 일신여학교 설립, 1913년 북장로교선교부가 부산 철수

 

  부산(釜山)이란 명칭은 14701215일자 ‘성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부산은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甑山)에서 유래한다. 증산이 가마를 닮았다고 부산으로 불렀다. 옛날 사람들은 시루()와 가마()를 동일한 구실을 하는 도구로 보았기에 증산을 부산으로 표기하면서도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1402(태종2) 태종실록에서는 지명을 ‘富山’으로 표기했다.

  부산으로 온 첫 번째 선교사는 호주장로교회 데이비드 선교사였다. 그는 부산으로 오는 도중에 천연두에 걸려서 도착 하루 만인 189045일 사망했다. 다음 해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가 부산에 들어와서 각기 자리를 잡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1913년 이후 북장로교가 철수한 뒤로는 호주장로교가 부산, 경남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호주 장로교에서 설치한 선교부는 다음과 같다. 부산(1891), 진주(1905), 마산(1911), 거창(1913), 통영(1913)

  18919월에 들어온 북장로교는 초량 인근 영주동에 선교부지를 확보하고 선교에 착수했다. 18925월부터 베어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117일 초량교회를 설립했다.

  반면에 189110월에 들어온 호주장로교는 좌천동에 터를 잡고 선교를 했고 부산진교회를 설립했다. (그런데 부산진교회 18911월 북장로 베어드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고 주장)

  초량교회는 부산지역 뿐 아이라 한강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순교자 주기철목사(1926-1931)3대 담임목사로 시무한 곳이기도 하다. 첫 예배 장소인 영선현의 베어드 사랑방(현재 코모도 호텔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은 1922년이고, 현재 석조예배당은 1967년 지은 것이다. 예배당 안에 20평 규모의 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영선현 시절부터 사용하던 당회록, 교인명부, 제직회록, 1922년 헌당했던 초량현 교회 사진과 예배당에 사용되었던 벽돌 그리고 주기철 목사가 사용했던 강대상과 의자를 전시해 놓았다.

 

  부산진교회는 동래여학교(구 일신여학교)와 함께 호주선교부에서 설립했다. 교회의 설립 연도는 불확실하다. 교회 옆에 있는 동래여학교는 1895년 호주선교부가 세웠던 일신여학교와 관련이 있다. 일신여학교는 일제 말기 선교사들이 추방당한 뒤에 폐교되었다. 해방 후 개인 재단이 학교를 인수해서 동래여학교를 다시 세웠다.  

  부산진교회 예배당은 1985년 지은 건물이고, 교회 로비 사료실에 옛날 교적부와 당회록, 선교사 자료 등이 있다. 마당에는 교회 설립자인 ‘멘지스와 무어 선교사 기념비’(1931년 건립)와 첫 호주 선교사 데이비드 기념비‘(2001년 건립)이 있다. 종탑에 걸려 있는 종은 1919년 호주에서 가져온 것이다.  

  교회 바로 앞에 1905년 건축한 () 일신여학교 건물(부산시 기념물 55)이 있다. 현재는 100년 전 일신여학교 학생생활과 삼일운동 자료, 기독교 자료 등을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교회 맞은편에 ‘일신여학교만세운동기념비’(1984)가 있다.

  교회 가까운 곳에 있는 일신기독병원은 1952년 호주 선교사 헬렌 맥켄지와 캐더린 맥켄지 자매가 세웠다. 병원 옆에 두 자매의 아버지 맥켄지 선교사기념비가 있고, 병원 별관인 맥켄지기념관 3층에 선교자료실이 있다.

 

 

☞주 소

초량교회(부산시 동구 초량11005-1), 부산진교회(부산시 동구 좌천동 763), ()일신여학교 건물(부산시 동구 좌천동 761-1), 일신기독병원(부산시 동구 좌천동 1-471)

 

☞주변 유적지

부산진교회와 ()일신여학교 건물, 일신기독교병원 - 초량교회 - 부산주교좌성당 - 부산근대역사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미문화원 건물)  - 40계단 기념관(육이오 피난민 생활관) - 육이오 당시 임시수도 기념관(국회의사당, 대통령 관사)

 

 

40. 부산(2) 성공회 주교좌 교회

 

1891년 인천 랜디스 신부가 일본인을 위한 영어학교 개설, 1897년 랜디스가 개종시킨 일본인이 부산으로 이주, 가정 예배시작, 1903년 부산주교좌교회 창립, 1924년 현재 예배당 신축

 

  부산주교좌교회는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해서 만든 교회였다. 1897년 인천에 있던 일본인 성공회 교인이 부산으로 내려와서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1903년 이고, 현재 예배당은 1924년 건축한 것이다. 예배당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 카트라이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카트라이트가 풍토병이 걸려 죽은 후에 사망 보상금을 그의 가족들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기증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관광코스 중 하나였다. 부산근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제 강점기 교회 사진을 보면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교회. 주변에는 변변한 건물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좁은 골목길에 밀집되어 있는 가정집들 때문에 교회 건물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다.  

  건물 규모는 200(60) 정도로 아담하다. 건물 위에는 스테인글래스로 만든 은빛 종탑이 우뚝 솟아 있고  종탑 십자가는 삼위일체 십자가형이다. 외벽 아래는 화강암이고, 외벽 위로 벽돌을 쌓아 올렸다.

  내부 공간은 좌우 6:4 정도로 나누어져 있다. 1964년 증축하면서 예배당 길이는 그대로 놔두고 오른쪽으로 확장공사를 한 결과이다. 두 개의 공간은 아치형 기둥으로 구별된다. 현재 오른쪽 공간은 성가대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정은 120개의 바둑판 문양이다. 이 문양은 노아의 방주와 성령을 박기 위해서 기도했던 120명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제단 입구는 둥근 아치형으로 그 아치 틀은 들쑥날쑥 이다. 이것은 톱니바퀴처럼 큰 돌과 작은 돌을 번갈아 쌓는 방식으로 ‘석축물림’ 기법이라고 한다. 강대상 윗벽에 6줄기가 뻗어나가는 장식은 5대양 6대주로 복음이 뻗어 나가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종탑은 제단 뒤에 있는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종탑의 겉과 속은 다르다. 종탑의 외양은 스테인글래스이지만 종탑 내부는 목재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우물 정()자 모양의 틀이 보인다.  종탑 안에는 1924년 축성식 때 사용된 종이 보존되어 있다. 일제 말기 일본인들이 이 종을 공출로 빼앗아 갔다. 부산항에서 종을 싣고 갈 배를 기다리는데 8.15 해방이 되었다. 종은 무사했고 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주 소

부산주교좌교회(부산광역시 중주 대청동 218)

 

☞주변 유적지(소개하는 곳은 모두 관람료가 없음)

부산근대박물관(부산시 중구 대청동 104, 부산시 지정기념물  49)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로 신축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로는 미국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 세상을 주목을 받기도 했었다. 지금도 부산근대박물관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부산 시민들이 많다. “옛날 미 문화원 자리가 어디냐” 고 물어야 더 빨리 찾을 수 있다.

40계단 문화관(부산시 중구 동광길 49)은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은 피난민 촌이 있던 곳이고, 가족을 상봉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임시수도기념관(부산시 서구 부민동 322, 부산시 기념물 53)1926년 준공된 2층 벽돌건물이다. 기념관 안에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 관저를 재현한 전시실이 있다.  

그 외에 조선통신사역사관(부산시 동구 범일동 자성대공원 동편 혹은 동구 자성로 99)있다.

 

 

41. 대구시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제일교회와 동산의료원 선교사주택

 

1892년 북장로교 베어드가 부산 초량교회 설립, 1893.4년 베어드가 대구 방문(대구제일교회 창립), 1896.9 베어드가 대구 부임, 1897.4 아담스가 대구 부임, 1899년 대구선교부 설치, 존스 선교사가 제중원 개원, 1900년 아담스목사가 계명학교 설립, 1906년 계명학교 중등과정 신설, 1914년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의 선교 협약, 1933년 현재 남성동 예배당 건축

 

  삼국시대 대구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佛城), 달구화(達句火), 달구벌(達句伐)로 불렸다. ()와 벌()은 촌락, 읍성을 의미하고 달()은 넓은 공간이란 뜻이다. 대구란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달구벌을 한자로 옮긴 대구(大丘)로 불리다가, 조선 영조 때(1748)부터 대구(大邱)로 바뀌었다. 땅이 좋고 경주와 가깝다는 점 때문에 신라 신문왕은 수도를 대구로 옮기려고 했었다.

  대구에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893년이다. 그 해 봄 베어드 목사는 마산,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울산, 밀양, 대구 등지를 돌며 전도를 했다. 베어드가 대구에 도착한 날은 422일 토요일이었다고 한다. 대구제일교회는 이 날을 창립기념일로 지킨다.  

  얼마 후 베어드가 대구 선교사로 부임했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대구 선교의 실질적인 창설자는 아담스 목사였다. 아담스는 18974월 부임해서 1912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대구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건축했고, 계명학교를 설립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특히 여러 종류의 과일 나무를 재배했다고 한다. 그중에 사과 나무를 대구로 보냈다. 보내온 사과나무는 대구선교부 내에 심겨졌고, 인근에서 농사 짓는 교인들에게 보급되었다.  대구 사과의 명성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남성동 터를 구입한 것은 18961월경이다. 대지 420평에 초가 5. 기와 4동이었는데 이 건물들을 예배당, 병원, 학교로 이용했다. 아담스 외에 대구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는 부르엔, 에드먼, 존스 등이 있다. 선교사들은 안경말(그 당시 자전거를 부르는 말)을 타고 지역을 돌며 전도를 했다. 부르엔과 에드먼은 귀신을 쫒아 내는 능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고쳤고 귀신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했다. 아담스는 교회 내에 계명학교를 설립해서 교육 선교를 했고, 존스는 제중원(혹은 동산의료원)에서 의료 선교를 맡았다.

  현재 있는 예배당(대구 유형문화재 30)1933년 건물로 고딕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평면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으로 한식 합각지붕을 했다. 건물 정면 중앙에 현관이 있고 종탑은 오른쪽에 있다. 건물 측면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렸고 일정한 간격으로 벽면에 버팀목을 세워 놓았다. 벽에는 서구식 오르내림식 창문을 좁고 긴 폭으로 설치했다. 위아래 창문 양식이 다른데, 1층은 반원 아치창, 2층은 Qy족한 아치창이다. 건물에 입체감을 주기 위해서 층 사이와 처마에 있는 벽돌을 벽보다 튀어 나오게 한 것이 이채롭다.

 

  예배당은 2층에 있는데 1층 정문으로 들어가서 좌우에 있는 긴 홀과 연결되어 있다. 예배당 바닥은 긴 목재 마루를 깔았고, 벽면은 회반죽을 발랐다. 천장 목재는 ‘자 모양’으로 마감했다. 오른쪽 종탑은 1937년 세운 것이다. 제일교회 교인 이주열 권사가 자신의 논을 팔아 헌금한 돈으로 지었다. 5층 높이(33m)의 벽돌 종탑은 각 층마다 창문의 모양과 구성을 다르게 했고, 맨 위에는 팔각형의 첨탑을 세웠다.

  이 예배당의 현재 이름은 ‘남성동 선교관’이다. 1996년 대구제일교회가 동산동 234번지(남성동 선교관과 도보로 10분 거리)로 이사 가면서 붙인 이름이다. 평일에는 굳게 닫혀 있다가, 주일 11시 예배 때만 개방한다. 교회 마당에는 아담스 선교사 비(1935년 건립)와 대구제일교회 창립50주년 기념비(1947년 건립)가 있다.

  동산동으로 가면 지하 2, 지상 5층으로 새로 지은 대구제일교회 건물이 있다. 교회 주변에 있는 동산동 청라언덕 일대는 대구 스테이션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교회를 거쳐서 동산의료원(구 제중원)으로 들어가서 왼쪽에 ‘동산의료원 개원 100주년 기념종탑’(1999년 건립)이 있다. 종탑은 병원의 유서깊은 정문과 중문 기둥, 담장 일부를 가져와서 지은 것이다. 그 위에 병원 초창기부터 사용했던 종을 매달아 놓았다. 종탑 옆에 있는 사과나무는 70년이 넘은 것으로 초대 원장인 존스 선교사가 심은 것이다. 현재 대구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어 있고 나무 앞에 ‘사과나무 100주년 기념비’까지 있다. ‘청라 언덕 기념비’에는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동무생각> 가사가 새겨져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종탑 맞은편에 대구선교사 묘역인 ‘은혜의 정원’이 있다. 정원 안에 12개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대구, 경북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과 자녀들이다.

  동산의료원 안에 있는 3채의 선교사 주택은 1910년 경 건축되었다. 거주했던 선교사들의 이름을 따라서 스위츠주택(대구유형문화재 제 24, 현재 의료선교박물관), 챔니스주택(대구시유형문화재 25, 현재 의료박물관), 블레어 주택(대구시유형문화재 26, 현재 교육역사박물관)으로 불린다. 챔니스와 스위츠는 ‘은혜의 정원’에 안장되어 있다.

 

☞주 소

대구제일교회 구 예배당(대구시 중구 남성로 50), 동산의료원(대구시 중구 달성로 216)

 

☞주변 유적지

계산성당(대구시중구 계산동 271, 사적 290)은 남성동 선교관에서 대구제일교회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 1827년 정부의 핍박을 피해서 대구로 온 천주교인들이 세웠지만, 성당은 로베르 신부가 부임한 1886년을 설립년도로 지킨다. 현재 건물은 1902년 완공한 것으로 로베르 신부가 직접 설계했다.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출입구 좌우에 2개의 종탑을 설치했고, 건물 중앙 윗 면에 장미꽃 잎 모양의 창을 냈다. 이곳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았고,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렸다.

 

계성중학교(대구시 중구 대신동 277)1900년 아담스 목사가 설립한 학교이다. 1906년 중등과정을 설치하면 오늘날의 중.고등학교로 발전했다. 학교 안에 3동의 오래된 건물이 있다. 학교 본관으로 사용 중인 핸더슨 관(1931년 건축, 대구시 유형문화재 47)은 블레어가 미국에서 모금해온 선교비로 지은 것이다. 아담스관(1908년 건축, 대구시 유형문화재 45)은 교무실, 방송실, 컴퓨터 실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지하실에서 삼일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맥퍼슨관(1913년 건축, 대구시 유형문화재 46)은 건물을 짓는데 큰 도움을 준 미국인 독지가 맥퍼슨의 이름을 딴 것이다.

관덕정 순교기념관(대구시 중구 남산2938-19)은 경상도 지역 천주교인이 처형 당한 곳에 세운 기념관이다. 지하 1층과 지상 3층 건물이고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순교자들의 유물, 대구 유일의 성인인 이윤일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42. 경북 안동시 안동교회

 

1891년 북장로교 베어드 부산 부임, 1893년 베어드가 대구, 안동을 포함한 경상도 지역을 순회 전도, 1902년 대구에 있던 아담스목사가 안동 시장에서 전도, 국곡교회와 풍산읍교회 설립, 1908년 안동 선교부 설치. 쏘텔 목사가 부임, 1909년 안동교회 창립예배, 크로스터 부임, 1910년 플렛처 선교사 안동성소병원 설립, 1954년 경안노회에서 경안중고등학교 설립 

 

  신라시대 안동은 고창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930년 고려 왕건이 후백제 군을 물리친 후에 ‘동쪽을 안정시켰다’는 의미인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고창 전투에서 고려는 경주를 제외한  경상도 전 지역을 차지했고, 그 세력을 강원도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다. 안동은 조선 시대 석학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의 고향이기도 하다.

  안동은 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강한 지역이다. 지금도 향교 2, 서원 5개 외에 사찰이 71군데이다. 안동에 기독교를 전한 이는 북장로교 베어드 목사이다. 그는 1893년 경남 지역을 다니며 순회전도 할 때에 안동을 방문했다.

  본격적인 안동 선교는 1902년 대구선교사 아담스가 주도했다. 아담스는 안동 시장에서 전도하고 전도지를 팔았는데 그 결과로 국곡교회와 풍산읍교회가 설립되었다. 1903년 베렛과 부루엔 선교사가 전도 집회를 했는데 안동 시내와 인근 지역에 더 많은 신자가 생겼다.

  안동 선교부는 1908년 설치되었다. 쏘텔이 상주 선교사로 부임했지만 전도하러 나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쏘텔의 후임으로 크로스터가 부임했다. 크로스터는 40년 동안 안동을 지키며 선교활동을 했다. 크로스터의 한국 이름은 권영찬이다. 원래는 구영찬으로 했다가 “안동에 권씨는 있어도 구씨는 없다”는 말에 성을 갈았다고 한다.  

 

  안동교회가 설립되는 데는 대구 선교사 아담스의 역할이 컸다. 아담스는 풍산읍교회 교인 김병우를 매서인으로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안동시 대석동 초가 5칸을 마련해서 기독교서점을 열도록 했다. 19098월 이 곳 서점에서 김병우, 강복영, 윤화순 등 8명이 모여서 첫 예배를 드렸다.

  현재 있는 예배당은 1937년 완공한 것이다. 육중한 화강암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모습이 산과 같은데 꼭대기에 돌 십자가를 세워놓았다. 예배당 양쪽에 망대처럼 붙어 있는 사각 종탑위에도 돌 십자가를 세웠다. 마치 골고다 언덕위에 서있는 3개의 십자가를 보는 것 같다. 예배당 2층에 아치형 정문 2개와 창이 있고, 양쪽 정문 위에는 그늘막이 눈썹처럼 붙어 있다.  

  1911년 설립한 계영학교는 양반과 상민,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교육기관 이었다. 1924년엔 경안중학교를 설립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곧 문을 닫았다. 1948년 교회에서 시작한 유치원은 안동 최초로 2011년 현재까지 63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삼일만세 시위 때는 담임 목사인 김영옥 목사, 교회 설립자인 김병우 장로를 포함한 많은 교인들이 참여했다. 만세 시위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특히 김병우 장로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이중희 장로는 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에 걸려서 10일간 유치장 생활을 했다.(그러나 얼마 후 유치장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군이 예배당을 강제로 빼앗아 가서 육군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교회 담임이었던 김광현 목사는 예비 검속에 걸려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8.15 해방이 된 다음 날에야 풀려났다.

  안동교회와 관련해서 장로교 면려회(Christian Endeavour, 약칭은 CE)운동을 들 수 있다. 면려회는 안동지역 선교사 앤더슨이 시작한 운동이다. 삼일운동 이후 좌절감에 빠진 교회 청년들을 위한 신앙운동으로 시작했고, 야간학교, 금주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 농촌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다. 4개월 만에 30여 교회가 면려회를 조직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212월 안동교회 당회록 기록에 따르면 안동교회가 최초로 면려회 설치를 결의했다고 한다.

  교인 가정 중에는 4대째 장로를 배출한 경우도 있다. 삼일만세 시위와 관련되어 사망한 이중희 장로의 가정은 이중희 - 이재상 - 이인홍 - 이정일 4대가 장로로써 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에서 600m 떨어진 곳에 경안고등학교가 있다. 경안고등학교는 1954년 안동교회가 속한 경안노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학교 입구에 윈 선교사를 포함한 3명의 선교사 무덤이 있다. 윈은 안동에 주재했던 29명의 선교사들 중 유일하게 안도에 묻힌 경우이다. 나머지 무덤 2개는 생후 1년을 전후해서 죽은 선교사 자녀가 묻혀있다. 윈 선교사의 무덤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는 죽지 않고 잠자고 있다(He is not dead but sleepeth)

  학교 안에 있는 ‘경안역사관’은 선교사 사택을 개조한 것으로 경북 북부에서 선교사가 지은 건물로는 유일하다. 이곳에 살았던 선교사는 6.25 전쟁 이후 안동으로 와서 경안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지냈던 존슨이다. 기념관 안에는 선교사 유품과 안동지역 역사유물이 있다.  

 

 

☞주 소

안동교회(경북 안동시 화성동 151), 경안고등학교(경북 안동시 금곡동 124)

 

☞주변 유적지

도산서원(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61, 개인 1,500/단체 301,300)과 하회마을(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개인 2,000/단체 1,700), 이육사문학관(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등이 있다.

 

 

43. 경북 영천시 자천교회

 

1897년 아담스와 권헌중의 만남, 1898년 권헌중 가정 예배 드림, 1903년 자천교회 설립, 1904년 현재 예배당 건축, 1913년 신성학당 개교, 1925년 권헌중 소천

 

  자천(慈川)은 보현산의 다른 이름인 자모산(慈母山)과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를 합친 말이다. 안동교회와 마찬가지로 자천교회도 아담스와 관련이 있다. 대구 선교사 아담스와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이 만난 것은 1897년 이다. 당시 권헌중은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대구로 이사를 가는 중이었다. 암담스의 전도로 권헌중은 대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영천 화북면으로 들어와 살게 된다. 1898년부터 자신의 집을 서당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가정 예배를 드리다가 190341일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현재 예배당(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452)1904년에 건축했다. 건축하기 전에는 마을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래서 주민들을 위해서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를 만들어 주는 조건으로 예배당 건축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건물은 겹자형 일자 예배당이다. 두 개의 예배당을 병렬로 붙인 정사각형이다. 지붕은 우진각 형태로 기와를 덮었는데 지붕면은 4면이고 4개의 내림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난다. 지붕 위는 평평한 공간이고 지붕이 높은 것은 두 집을 감싸기 위함이다.

  예배당 앞에 권헌중 장로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 예배당 옆에 키작은 굴뚝과 독특하게 생긴 종탑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4개의 기둥이 가운데 있고, 기둥들 사이는 나무 칸막이로 막혀있다. 나무 칸막이는 남녀가 얼굴도 보지 못하고 따로 앉아 예배드리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예배당 안에 있는 방 2개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가 잠을 자던 곳이다.

  예배당 오른쪽에 있는 ‘ㅁ자’ 건물은 신성학당이다. 원래는 권헌중 장로가 살던 집이었다. 현재는 처치스테이(Church Stay), 기도실, 별빛문고, 역사자료실 등으로 사용 하고 있다.

 

 

☞주 소

영천자천교회(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3773)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지가 없음

 

 

44. 경북 봉화군 척곡교회

 

1907년 척곡교회 설립, 1909년 현재 예배당 건축, 1921.5.19 면려회 조직, 1940년 김종숙 체포, 명동서숙 폐쇄

 

  삼한시대 봉화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기저국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옥마현, 고려 시대에는 봉성현으로 불렸다. 봉화군은 조선 고종 32(1895)부터 사용된 지명이다. 척곡은 자 척()과 골짜기 곡()을 합친 말로 계곡이 자처럼 길고 깊다는 뜻이다. 또한 천곡(川谷)이란 연못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다.

  교회 설립자는 김종숙이다. 김종숙은 대한제국의 탁지부(현재 재경부) 주사였다. 그는 외교관 양성소인 외국어학원 일본어 과정을 마쳤고 참의(국장급) 승진을 앞둔 실력있는 관리였다. 그가 기독교에 귀의한 이유는 새문안교회에서 들었던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 한마디였다. 그는 믿음을 얻었고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야소교를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련없이 벼슬을 버렸고 처가가 있는 봉화 척곡리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문촌교회(봉화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1907517일 문촌교회 교회 장복우 성도와 함께 척곡리에 교회를 설립했다.  그 해 1116일 웰번 선교사가 와서 최재구와 우재곡에게 학습의식을 베풀었다.

  현재 건물(등록문화재 257)19096월에 건립한 것이다. 최재구가 토지 3마지기를 기증했고 김종숙은 헌금을 했다. 9(22) 규모에 ‘ㅁ자형’ 기와 예배당 그리고 6(12) 자형’초가 명동서숙을 같이 세웠다.

  몇 차례의 증축 과정을 통해서 변형이 되기는 했지만, 척곡교회는  국내 유일의 ‘ㅁ자형(정사각형)’ 예배당이다. 현재는 기와 대신에 함석지붕을 씌웠고, 예배당 앞면은 새로 쌓은 벽돌로 마감을 했다. 건물 뒤쪽에는 사각 면이 툭 튀어나와 있는데 그 부분은 제단에 해당된다.

  예배당 실내는 마룻바닥을 깔았고 그 위에 긴 의자를 놓았다. 제단은 북쪽에 있다. 밖에서는 돌출부분이지만 실내에서 볼 때는 움푹 들어간 부분이 된다.  

  교회 왼편에 있는 명동서숙은 1993년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현재는 기념교육관으로 사용 중이다. 명동서숙은 척곡리의 다른 이름인 건명동(乾明洞) 즉 ‘하늘 아래 밝은 동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자형 건물이고 격자형 문을 해 달았다. 뒤쪽엔 툇마루를 놓았고 추울 때 불을 뗄 수 있는 구들방까지 있다. 1칸은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했고 나머지 5칸을 교사(校舍)로 사용했다고 한다.

 

  김종숙은 이 학교를 통해서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항일독립정신을 심어 주었다. 교과목은 영어, 성경, 국어 산수, 역사, 통역, 체조 등 다양했고, 입학시험과 작문 시험을 볼 때에는 반드시 애국과 독립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김종숙의 열심 있는 전도와 교육 열정으로 교회와 학교는 봉화지역의 구심점이 되었다. 주일이면 120여 명이 모여서 예배드렸고 이 지역의 웬만한 주민들은 명동서숙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에 김종숙이 독립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가를 숨겨준 일이 발각되었다. 김종숙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명동서숙은 폐쇄되었다.

  척곡교회가 간직한 특별한 역사가 있다. 장로교에서 제일 먼저 면려회를 시작한 것이다. 안동교회가 면려회를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1921.4.5)이라면 척곡교회는 앤더슨 목사가 직접 면려회를 조직하고 축도(1921.5.19)까지 해 준 교회가 된다. 그리고 김태규 영수가 지역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순교를 당한 역사(1950.1.3)도 있다.

  예배당 외에 남아 있는 유물은 세례교인 명부(1907.5.17), 척곡교회 면려회 회의록과 회원명부, 척곡교회 당회록, 척곡교회 기복금 기성회 회의록 등이 있다. 이 자료들은 경북지방 문화재 570호로 등재되어 있다. 문서가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문서로는 최초가 된다. 조만간 교회의 다른 자료들을 모아서 ‘문서사료집’을 만들 예정이다.

  명동서숙 벽에는 한문으로 쓰인 식사 기도문이 붙어 있다. 일제 강점기 명동서숙에서 사용했던 기도문이다.

 

敬事天夫(경사천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존경을 돌림니다)

賜我食物(사아식물, 나에게 먹을 거리를 주시니)

每番不忘(매번불망, 매번 먹을 때마다 감사하여 잊지 않겠습니다)

 

☞주 소

척곡교회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1833-1)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지는 없다. 일반 유적지로는 닭실마을(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63)이 있다. 닭실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 촬영지였고, 마을 안에는 오래된 한옥들과 서원, 박물관 등이 있다.

 

 

45. 경북 울진군 행곡교회와 행장교회

 

1896년 침례교(엘라딩선교회)가 강경과 공주에서 전도시작, 1906년 펜윅이 대한기독교회를 창설, 1908년 감리교와 침례교(행곡교회 설립)가 들어 옴, 1909년 행장교회 설립, 1934년 현재 행곡교회 예배당 건축, 1936년 현재 행장교회 예배당 건축

 

 

  삼한 시대 울진은 진한에 속한 우유국(優由國)으로 불리다가 3-4C 경 신라에 복속되었다. 장수왕 때 고구려 영토가 되면서 우진야현(于珍也縣) 혹은 우진(于珍)으로 불렸다. 울진(蔚珍)은 ‘진귀한 보배가 많다’는 뜻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된 지명이다.

  울진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로부인의 설화(일명 헌화가)와 관련된 곳이다. 지나가던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에게 벼랑 끝에 피어 있는 철쭉꽃을 꺽꺾다 주었다는 전설은 4-5월 울진지역 철쭉제의 배경이 된다. 울진은 원래 강원도 지역이었지만 1963년 행정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선교 초기에는 북장로교 구역이 아니라 남감리교 구역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울진에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908년경이다. 감리교와 침례교가 동시에 들어 왔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일제 강점기 중간에 폐쇄되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감리교가 다시 들어 온 것은 해방 이후가 된다.

  침례교회가 설립은 울진 출신인 전치규, 전치주, 남규연, 남규백 등이 19082월 충남 공주에서 열린 침례교 총회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해 1115일 남규백의 집에서 창립 예배를 드렸고 울진 최초 교회인 행곡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가 설립된 행곡이란 지명 속에는 원효대사의 전설이 있다.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바위 구멍에서 매일 쌀이 저절로 생겨서 원효대사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후 마을 이름은 쌀과 고(창고고,)를 합친 ‘쌀고’로 불리다가 쌀고를 살구로 착각한 후대 사람들에 의해서 행촌(杏村) 즉 살구마을이 되었다.

  현재 예배당(등록문화재 286)1934년 건축한 것이다. 땅은 남규백이 기증했고 건물 자재는 울진 병영 건물을 해체하고 남은 재료들을 사용했다. 예배당 입구에서 동쪽에 목사 사택이 있고 서쪽에는 현재 예배당(1983년 건축), 북쪽엔 옛 예배당이 있다. 세 개의 건물이 배치된 평면도는 ‘ㄷ자’형을 이루고, 교회 마당에는 100년 넘은 모과나무가 마침표처럼 서 있다.

  건물은 정면 4, 측면 2칸 한옥 형태의 긴 직사각형이다. 원래는 팔작 지붕에 전통 기와를 얹은 형태였지만 1995년 이후로 금속 기와로 대치했다. 막돌로 쌓은  단층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교회 출입구는 목재 두짝미서기문(문이 두 개이고 좌우로 열고 닫을 수 있음)이고 벽좌우에는 격자형 두짝미서기 창을 달았다. 정면 오른 편에 있는 외닫이 문은 목회자 출입문이다.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칸이고 강단은 동쪽에 있다.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한쪽 구석에 있는 마룻장을 들어내면 2m 깊이에 반 평 넓이의 반공호가 있다.

  천장 들보에 있는 상량문에는 묵으로 쓴 ‘嘉慶十四年己巳三月二十五日午時立株上樑(가경십사년기사삼월이십오일오시입주상량)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가경 십사년는 조선 순조 9년에 해당된다. 1809년 울진병영을 세웠다는 말이다. 그리고 1934년 병영건물을 해체해서 예배당을 지었다. 제단 위에 있는 강대상과 의자, 손잡이 놋 종은 100년 전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교회에는 한옥 예배당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 있다. 현재 목사 사택으로 사용 중인 건물인데 거의 90년은 넘었다고 한다. 행곡교회 성도(2012년 현재 86)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행곡교회는 침례교 21명의 순교자 중 3명을 배출했다. 행곡교회 설립자 중 하나인 전치규 목사(당시 침례교 총회장)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헌병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함흥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고문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순교했다.(1944) 신사 참배와 관련해서 행곡교회도 폐쇄되었고 담임 전병무 목사는 8.15 해방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해방 후에는 담임 전병무 목사(해방 후 행곡교회로 복귀)와 남석천 성도가 공비에게 잡혀서 총살을 당했다.

  행곡교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용장교회(등록문화재 287)가 있다. 행곡교회가 성장하면서 개척한 교회다. 1909년 설립되었고 1936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예배당을 지었다. 죽변면(竹邊面)은 대나무가 많이 나는 곳, 화성리(花城里)는 주변에 있는 산들이 꽃잎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건물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 단층에 팔작지붕이다. 벽은 흙벽 위에 시멘트 몰타르를 뿌렸다. 건물 정면에 있는 출입문은 두짝미서기문이고, 좌우에 두짝미세가창을 냈다.

  내부는 통간이이고 바닥엔 한식 마루를 깔았다. 강단은 출입구 오른 편에 있고 제단 벽에는 낡고 오래된 장의자가 붙어 있다.

 

☞주 소

행곡교회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102), 용장교회(경북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108)

 

☞주변 유적지

관동 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울진군 평해읍 362-2)과 망양정(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2) 그리고 성류굴(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850-1, 천연기념물 155), TV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죽변면 죽변등대), 봉평신라비전시관(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등이 있다.

일정은 행곡교회 - 망양정 - 용장교회 - 봉평신라비전시관 - 폭풍 속으로 드라마 세트장으로 할 수 있다.

 

 

 

46. 경남 창원시 주기철목사기념관,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1901년 북 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교회 설립, 1903년 두 교회가 합쳐서 제일문창교회(구 마산포교회)로 통합, 1909년 창신학교 설립, 1911년 마산 스테이션 설립, 1913년 의신여학교 설립

 

  마산에 기독교 들어 온 것은 1901년이다. 그 때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가 동시에 들어와서 각기 교회를 설립했고 1903년 통합하면서 마산포 교회로 불렸다. 이후 호주 선교부에서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를 설립했고, 마산 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제일문창교회(구 마산포교회)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목회(1931-1936)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구 제일문창교회 터에 남아 있는 것은 주기철 기념관과 ‘옛 창신학교 터비’이다. 창신학교는 1909년 호주 선교부가 세운 마산 최초의 근대 학교였다. ‘가고파’를 지은 노산 이은상은 교회 설립자 중 하나인 이승규의 아들로 창신학교 졸업생이다. 이 학교는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은 창원시 창원공원 묘원 내에 있다. 기념관에는 부산,경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은 호주 선교사들의 사용했던 성경책과 한영사전(1897년 발간), 부산진교회 당회록, 라이트 선교사가 밀양마산교회에 기증한 종 등이다.

  ‘순직 호주선교사 묘원’은 기념관 왼쪽에 있다. 묘원으로 가는 십자가 통로 양 벽에는 호주 선교사 126명의 사진이 붙어 있고 묘원 안에는 8명의 선교사들과 경남 출신 순교자인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기념비가 있다.

 

☞주 소

제일문창교회 터와 옛 창신학교 터(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87-1)

마산스테이션 터(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74)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과 순직 호주 선교사묘원(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인곡리 산167-3)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지는 없음

 

 

47. 경남 그 외의 지역(호주장로교 중심)

 

1890. 4 데이비드가 부산에서 사망, 1891.10 호주 선교사 5명이 부산 도착, 1905년 진주스테이션, 1911년 마산(현재 창원)스테이션, 1913년 통영과 거창 스테이션

 

 

  호주장로교는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했고 각 지역에 스테이션(선교부)을 설치했다. 부산, 마산(창원) 이외의 호주 장로교 유적지로는 거창군과 진해시 정도가 있다.  

  거창군에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904년 경 북장로교를 통해서 였다. 그 해(1904) 가을 개명리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마상동교회, 대야리교회, 와룡리교회와 거창읍교회가 설립되었다. 1913년 이후 거창이 호주장로교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거창교회(구 거창읍교회)1909년에 설립되었고, 예배당 옆에‘주남선기념관’이 있다. 주남선 목사는 1951년 인민군에게 매를 맞아 순교했다. 기념관 안에는 당회록, 성경책, 강대상, 종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남선 목사의 무덤은 대전 국립묘지에 있다.

  거창고등학교는 호주선교부가 세웠던 명덕학교(1915년 설립)가 발전한 것이다.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거창교회는 학교를 인수해서 운영 발전시켰다.

  진해시에 있는 웅천교회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모교회가 된다. 교회 안에 주기철목사 기념관과 기념비가 있다. 그밖에 주기철 목사와 간련된 유적은 부산 초량교회 역사관(주기철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과 의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주기철목사 무덤), 창원시 주기철목사기념관과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주기철목사 기념비 등이 있다.

  진주시와 통영시에는 특별한 유적지가 없다. 간단하게 선교 약사만 적어 본다면 진주는 1905년 호주 선교사 커렐과 박성애 부부가 도착해서 진주 선교부를 설치했고 전도와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1906년 시원여학교와 광림학교를 설립했고, 1913년 배돈병원을 세웠다. 현재는 남은 유적이 없다.

  통영시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894년 경이고 호주장로교 무어 목사가 복음을 전했다.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는 1902년 동항리교회다. 선교부는 1913년 설치되었다. 충무교회(1905년 설립, 구 대화정교회) 마당에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선교 1000주년 기념탑’이 있고, 교회 근처(통영시 문화동 269)에 옛 호주 선교부 건물 잔해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주 소

거창교회(경남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216), 웅천교회(경남 진해시 성내동 385), 충무교회(경남 통영시 문화동 183)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지는 없음

 

 

7 장 전라도

 

1892.11 남장로 선교사 입국, 1893.1 장로교 공의회에서 ‘전라도와 충청도를 남장로교 선교구역’ 결정, 1893.6 정해원이 은송리 초가에서 첫 예배(전주서문교회 설립), 1894.3 테이트 선교사 남매가 전주 부임, 전주 선교부 설치, 1895, 군산 선교부 설치, 1898년 목포 선교부 설치, 1904년 광주 선교부 설치, 1913년 순천 선교부 설치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친 말이다. 다른 말로 호남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동정호 아래 지역을 호남(湖南)으로 부르는데 우리나라에는 김제 벽골제 혹은 금강 이남 지역을 호남이라고 부른다.

  전라도 지역의 전도는 남장로교에서 주도했다. 1893년 남.북장로교회 공의회는 남로교가 충청도와 전라도 전도를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인력과 재정적인 문제는 남장로는 전라도 지역전도에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로 충청북도는 북감리교(충주중심)와 북장로교(청주중심)가 전도 활동을 벌였고, 충청남도는 공주를 중심으로 한 북감리교가 우세한 가운데, 침례교와 성결교가 전도활동을 벌였다. 전라도 선교에 자심감을 얻은 남장로교가 충청남도 선교에 뛰어 든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남장로교의 전라도 선교는 전주에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전도운동을 벌였다.

 

 

48. 전북 전주시 전주서문교회, 신흥학교, 엠마오 사랑병원

 

1893.6 정해원이 은송리에 초가집을 마련, 첫 예배를 드림(전주서문교회 설립). 그 해 가을 선교사들의 방문, 1894.3 테이트 선교사 남매 부임, 전주 선교부 설치, 1898.12 잉골드 선교사 예수병원 개원, 1900.9 레이놀즈 목사 신흥학교 시작, 선교부를 은송리에서 화산리로 이전, 1902년 기전여학교 설립

 

  삼한 시대 전주는 마한 땅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고 완산이라고 불렸다. 전주는 신라 경덕왕 15(757)부터 사용된 지명이다. 신라 말기에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였고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감영이 있었다.

  전주에 기독교를 전한 것은 남장로교였다. 18936월 남장로교는 정해원을 전주로 보내서 선교 대지를 구입하도록 했고 정해원은 은송리(현재 전주 동완산동 2307-1)에 초가를 마련하고 예배를 시작했다. 그 해 전킨과 테이트 목사가 전주를 방문해서 2주간을 머무르며 선교 가능성을 탐색하고 돌아갔다.

  18943월 테이트 목사 남매가 전주에 내려왔고 선교부가 설치되었지만 동학난으로 다시 서울로 되돌아갔다. 선교사들이 다시 전주를 방문해서 은송리 주택 외에 초가 집 두 채를 마련한 것은 18952월이었다. 다음 해 부터 테이트 목사 남매와 해리슨, 레이놀즈 가족, 잉골드 등 선교사들이 합류하면서 전주서문교회, 예수병원, 신흥학교로 이어지는 삼각 선교 거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전주 선교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은송리가 아니라, 화산동(현재 전주 완산구) 일대가 된다. 화산으로 선교부를 옮긴 것은 1900년으로 조선 왕조의 태생지인 전주를 성역화 하는 조선 정부의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화산동 선교 유적은 전주서문교회와 신흥학교, 엠마오 사랑 병원 등지에 흩어져 있다.

 

  전주 서문교회는 전라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18936월 은송리 초가에서 정해원이 행한 첫 예배가 교회 역사의 출발이 된다. 현재 자리로 교회를 옮긴 것은 1905년경으로 은송리, 화산동 서원고개 다음으로 3번째 터가 된다.

  서양 종교인 기독교가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에는  ‘포사이드 사건’이 있다. 의료 선교사였던 포사이드가 전주의 유력한 이씨 양반 댁에 왕진을 갔다가 강도들에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중상을 입은 포사이드는 요꼬하마로 이송되었고 포사이드의 치료를 받고 살아난 이씨 집안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힘 있는 양반 가문의 교회 출석은 교회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개종한 이씨 가문 사람들 중에 이거두리가 있다. 본명은 이보한 인데 길거리에서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찬송을 부르면 전도한다고 해서 ‘이거두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3.1운동 때는 서울까지 올라가서 만세를 불렀다. 경찰에 잡혀서는 유치장 이곳저곳에 오줌을 누어서 미친놈 취급을 받고 풀려났고, 전주로 내려오는 도중에는 거지들을 몰고 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3.1운동과 관련해서 당시 전주서문교회를 담임했던 김인전 목사는 전주지역 시위를 주도한 후 중국 상해로 망명을 했다. 중국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23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무덤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다.  

  교회 옆 백주년 기념관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역사 자료실이 있다. 문헌자료로는 1908년 제직회록, 1909년 당회록, 1910년 세례문답책과 교적부 등이 있고, 옛 예배당(1935년 건축, 1983년 철거) 머릿돌에서 나온 등사본 <전라도 선교 35주년 약력><전주서문교회 약사> 두루마리가 있다. 그 외 1937년 기전학교와 신흥학교가 문을 닫을 때 학생들이 폐교기념으로 교회에 기증한 목제 화분대가 있다.

  교회 마당에 한옥 종탑이 있다. 이 종탑은 1908년 별세한 전킨 목사를 기념해서 만들었다. 화강암 주춧돌 위에 세운 높이 6.8m 기둥과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교회 종탑 중 예배당과 독립된 종탑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종탑 옆에 있는 기념비는 1943년 ‘교회 창립50주년’을 맞아서 교인들이 세운 것이다.

  신흥학교(신흥고등학교)19009월 레이놀즈 목사가 자기 집 사랑방에서 김창국을 가르치면서 시작했다. 1937년 신사참배 문제로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문을 열었다. 남아 있는 유적은 1936년 강당으로 지은 스미스관(등록문화재 72,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 총무 이름)이 있다. 지금도 학교 강당으로 사용 중이다.

  건물 옆에 1928년 지었던 리차드슨관이 있는데 화재로 인해서 중앙 현관 출입구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외 오랜 된 건물은 인톤기념관으로 1962년 지었다.

  기전여학교(紀全學校)1902년 문을 열었다. 기전(紀全)1908년 전주에서 사망한 전()킨 목사를 기()념한다는 뜻이다. 신흥학교처럼 1937년 폐교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문을 열었다.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린튼(한국이름은 인톤) 선교사 부부 기념비가 있다. 린튼은 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하교 초대 학장을 지냈다. 그의 부인 린튼 부인은 기전여학교 교장이었다. 이들 부부의 기념비는 1956년 건립했다.

 

  기전여학교에 특별한 유적은 없다 그러나 1915년 결성되어서 매일 구국 기도회를 갖고 ‘천황 사진에 먹칠하기’ 운동을 벌였던 구국결사대, 삼일 운동 때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14인 결사대 등 기전여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는 100개의 돌비석보다 더 가치있다.

  신흥.기전학교를 나와서 예수병원 기독의학연구원과 예수병원 어린이집 방향으로 가다보면 ‘선교사 묘지 동산'이 있다 20평 묘지에는 17개의 무덤이 있다. 눈에 뛰는 것은 전킨 목사의 묘비와 그의 세 아들 시드니, 프랜시스, 조지의 묘비다. 세 명 모두 어려서 군산에서 죽었다. 그 외 예수병원을 설립한 잉골드 선교사와 유일한 한국인으로 예수병원 외과 과장이었던 박영훈 장로(1972년 사망)의 무덤이 있고 다.

  선교사 묘지 아래에 1949년에 지은 예수간호전문학교 교사(校舍)와 기숙사 건물이 있고, 1936년에 지은 구 예수병원 건물이 있다. 예수병원 건물은 지하 1, 지상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로 현재는 엠마오 사랑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예수병원 건너편에 있는 35평 단층 벽돌집은 해방 전에 지은 건물(전주 서완산동 145)이다. 해방 전에는 예수병원 간호사였던 매튜스가 살았고, 해방 후에는 총각 선교사 스미스가 살았다. 건축 년도는 매튜스 선교사가 전주에 살았던 기간(1923-1930)을 감안해야 하지만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다.

 

☞주 소

전주서문교회(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3123), 신흥고등학교(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188), 기전여학교(전북 전주시 완산구 우전로 137),  구 예수병원(현재 엠마오 사랑병원;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1149-1), 전주 선교사 묘역(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68)

 

☞주변 유적지

전주 한옥 마을(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83-4)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 촌으로 700여채의 한옥이 몰려 있다. 그리고 한옥 마을 입구에 위치한 전동성당(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200-1, 사적 288)은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유박해 때 처형당한 장소에 세워진 전라도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답사 일정은  기전여학교(린튼선교사 부부 기념비) - 신흥고등학교(스미스관과 리차드슨관) - 선교사 묘지 - () 예수병원 건물과 매튜선교사 사택 - 다가공원(김인전목사 기념비) -전주서문교회 역사관과 종탑 - 전동성당 - 전주 한옥마을

 

 

49. 전북 익산시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

 

1897년 남전교회 설립, 나바위 성당 설립 - 1919.4.4 만세시위 중 문용기 열사를 포함한 남전교회 교인 4명 사망 - 1923.5.18 두동교회 설립 - 1929년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 건축

 

 

  두동교회가 있는 익산시 성당면은 조선시대 세곡을 관리하기 위해서 세웠던 성당창에서 비롯된 말이고, 두동은 순우리말로 ‘막은 골’이란 뜻이다. 두동은 금강 물줄기와 함라산 줄기로 막혀 있는 외진마을이다.  

  익산에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897년경으로 군산 선교부의 전킨 선교사가 뱃길로 남전마을(현재 남전교회 설립)로 와서 복음을 전했다. 초기 남전리 사람들은 군산 구암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1899년경 남전리에 예배터를 마련했다.

  두동교회의 역사도 군산 선교부의 도움을 받는다. 1923년 군산선교부 해리슨 목사는 조사 김정복과 함께 두동으로 와서 전도를 했다. 그 때 박재신의 집안 여인들이 예수를 영접했고 인근 부곡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처음에는 박씨 집안 남자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부인들이 “교회에 다녀야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을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박재신의 아내가 임신하면서 사태는 돌변했다. 삼천석 지기 부자였지만 자식이 없었던 박재신은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자 “밤중에 부인들이 먼 길을 다녀선 위험하다”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 장소로 내 놓겠다고 했다. 1923518일 박재신의 사랑채에서 두동교회가 설립되었다. 얼마 후 박재신의 아들을 얻었고,  아이의 이름을 ‘요한’ 으로 지었다.  

  현재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자료 179)1929년 지은 것이다. 이 예배당은 요한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관련이 있다.  요한의 죽음에 충격받은 박재신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며 교회를 부정하고 아내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거기다가 박재신의 고모가 죽었는데 주일 날 출상하는 문제로 담임인 구연직 전도사와 갈등이 생겼다. 구 전도사가 주일 출상을 반대하자 박재신은 자신의 집에서 교인들을 내쫓았다. 한 때 80명이 넘게 예배드리던 교회는 20명으로 줄었고 당장 예배드릴 장소도 없었다.

  다행히도 남은 교인 중 이종규가 자신의 땅 100평을 기증했고, 여름 물난리로 좌초한 배에 있던 소나무를 헐값에 사서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예배당은 홑처마에 우진각 형태로 양철지붕으로 덮여 있다. 평면은 ㄱ자 형이고 동서 방향으로 4(남자석), 남북 방향으로 3(여자석)을 이러 붙인 24평 건물이다. 그러나 4평짜리 강단을 빼고 나면 남녀석 각기 10평씩으로 크기가 같다. ㄱ으로 꺾인 모서리 안쪽 마당에 있는 조선 소나무는 예배당 지을 때 뒷산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다.

  출입문은 남녀 출입문이 다르고 남녀 예배 인도자를 위한 문이 하나씩 더 있다. 내부는 전형적인 납도리 5량식(대들보 5)이고 서까래와 들보가 드러나는 연등식이다. 강단은 남녀석 중간을 향하고 있어서 남녀 모두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물론 남녀는 서로 볼 수 없다. 전북 문화재 전문가들은 “남녀유별적인 유교 전통이 무너져 가는 1920년대에 오히려 ‘ㄱ자형’을 통해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 주면서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했던 두동교회 예배당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주 소

두동교회(전북 익산시 두동리 385-1), 남전교회(전북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618-1)

 

☞주변 유적지

남전교회 교인 문용기의 기념비가 3군데 있다. 문용기는 191944일 익산 구 시장(당시엔 솜리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죽었다. 그는 일본 경찰의 칼에 양팔에 잘려 죽는 순간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서 충격을 받은 그의 어머니와 어린 딸이 죽었고 집안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그의 부인이 간직했다가 해방 후에 내 놓았다는 ‘피 묻은 옷’은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묘는 대전 국립묘지에 있고  기념비는 익산역 주차장, 오산면사무소, 구 시장(솜리시장)에 있다. 남전교회는 매년 구 시장에서 삼일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특히 구 시장에 있는 비석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익산역에서 30분 거리에 나바위성당(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18)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성당이고,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기념하는 예배당이다. 제단 오른 편에 김대건 신부의 목뼈 일부를 보관한 장소가 있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설립되었고, ‘나바위’란 이름은 납작한 바위(납바위, 나바위로 불림)가 많은 지역 특성에서 유래한다.  공식 명칭은 화산천주교회로 불린다.

현재 예배당은 1907년 전통 한옥으로 지은 건물로 1917년 약간 개축하면서 고딕양식(툇마루를 회랑으로 바꾸었고, 성전 정문에 고딕식 종탑을 설치했음)으로 변했다고 한다.

답사 일정은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 -남전교회 -  문용기 열사 기념비 방문(오산면사무소, 구 시장, 익산역 순서로) - 나바위 성당 - 논산시 강경에 있는 기독교 유적지 방문(북옥감리교회, 침례교 최초 교회 터, 병천교회 등)

 

 

50.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1904년 테이트 목사와 조덕삼, 이자익의 만남, 1905년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금산교회 설립, 1908년 현재 ㄱ자 한옥 예배당 건축, 1909년 이자익 장로선출, 1915년 이자익 금산교회 담임자로 파송

 

  금산교회의 설립은 남장로교 전주 선교부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테이트목사는 1893년 전주 선교부를 개척한 선교사 중 한 명이다. 1901년부터 말을 타고 다니며 익산, 김제, 정읍, 태인, 고부, 부안, 임실, 남원 등지를 다니며 전도를 하던 중에 금산 지역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금산은 미륵불교의 총본산인 금산사가 있는 곳이고, 강일순이 스스로 미륵이라 침하며 증산도를 창시한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 많은 신흥 종교가 금산 모악산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이방신의 나라였다. 또한 한반도 제일의 곡창지대인 김제.만경 평야가 있고 광산에서 나오는 사금(砂金)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금산은 테이트 목사가 전도를 위해서 전주와 정읍을 오갈 때 들리는 중간 지역이기도 했다.

 

  테이트 목사가 주로 머문 곳은 조덕삼이 운영하는 마방(마굿간 설비가 있는 주막집)이었다. 어느 날 밤 조덕삼이 먼저 테이트 목사를 찾아 가서 말했다. “선교사님 저는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는데 왠지 당신에게 관심이 갑니다. 또 당신이 믿는다는 예수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겠습니까?

  긴 시간 테이트 목사와 조덕삼의 대화가 이어졌다. 조덕삼은 “선교사님의 말을 듣고 또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이제 이렇게 제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그  동안 저는 인생에 대해 몹시 궁금하고 마음이 답답했던 처지였는데 제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앞으로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1905년 봄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금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그 해 10월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가 테이트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8년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할 예배당이 필요했다. 새로 지은 ‘ㄱ자형’ 한옥 예배당(전라북도 지방문화재 136)은 모악산 너머 배재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재실(무덤, 사당 옆에 제사 지내려고 지은 집)을 옮겨다 지은 것이다. 건물 구조는 단층 고패(일자로 된 집에 부엌과 외양간을 직각으로 이어 붙인 형태)로 남북으로 5, 북쪽 모서리에 2칸 집을 이어붙인 'ㄱ자형’ 27평 크기로 했다.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형태로 했고 남.북쪽의 출입문은 여닫이 격자무늬(바둑판식) 종이 문이다.

  실내는 기둥하나 없는 통칸이고, 천장가구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식이다. 천장가구는 납도리(기둥과 기둥 사이에 얹혀 있는 나무로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다) 5량식이고 지붕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마루도리와 중도리를 겹으로 올린 형태이다. 교회 지붕을 받쳐주는 대들보는 교인들이 모악산에 올라가서 직접 베어온 소나무로 만들었다. 남자석 상량문과 여자석 상량문에 각기 성경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자석 상량석에는 한문으로 여자석 상량문에는 한글로 기록했다.  

  바닥에는 쪽마루(한 두 조각의 통 널빤지를 가로로 대어 만든 마루)를 깔았고, 강단은 목회자가 밟고 선 발판까지 3단으로 구약의 지성소를 본떠 만들었다.

  건물 특징은 모든 재목을 깎아서 맞추는 이음새 맞춤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쇠로 된 못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배당을 건축한 이듬 해(1909)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이자익은 조덕삼이 운영하는 마방에서 마부로 일하는 일꾼이었다. 나이도 조덕삼보다 9살 아래였다. 그러나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다”는 조덕삼의 결단으로 별문제없이 통과되었다. 그 후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가 신학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었고, 이자익이 금산교회 담임자가 되었을 때에도 열심히 섬겼다고 한다. 이자익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다고 하는데 이는 장로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한다.

 

 예배당 안에는 오래된 강대상과 서양식 옛 의자, 100년 된 풍금, 나무로 만든 헌금통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 소

금산교회(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  

 

☞주변 유적지

교회 주변은 불교와 신흥 종교들이 몰려 있는 곳이라 금산교회 외에 특별한 기독교 유적이 없다.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 나바위 성당, 논산 강경에 있는 북옥감리교회 예배당과 주변 유적지를 잘 연계해서 방문하는 것이 좋다.

 

 

51. 전남 목포시 목포양동교회와 구 목포중앙교회 예배당(현재 오거리 문화센터)

 

1894.4.18 레이놀즈 목사와 드루 목사가 목포 선창가에서 전도, 1896.2 레이놀즈와 벨이 만복동(현재 양동) 대지 구입, 1897.3월 변창연이 목포로 내려와서 전도(목포양동교회 설립), 5월 벨과 해리스 선교사가 나주 부임(나주선교부), 10월 목포 개항, 1898.11 벨과 오웬목사 목포 부임, 목포 선교부 설치, 프렌치병원 시작, 1902년 영흥남학교와 정명여학교 설립, 1911년 현재목포양동교회 석조 예배당 완공, 1923.4.10 목포중앙교회 설립, 1920년 후반 구 목포중앙교회 예배당 건축, 1944.2.15 박연세목사 순교

 

  목포란 지명의 유래는 다양하다.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서 목포, 나무()가 많아서 목포(木浦), 목화가 많이 난다고 목포라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한 속현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물량군,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 백제시대에는 물아혜로 불렸다.

  목포에 기독교 복음이 도착한 날은 1894418일이다. 그날 목포 선창에서 레이놀즈와 드루 선교사가 전도를 했다. 그런데 "서울 남대문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영접했다” 는 목포 사람을 만나게 된다. 기독교 복음은 선교사들의 방문 이전에 목포에 들어 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누구인지, 계속 신앙생활을 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목포는 서해 바닷길을 통해서 인천, 서울과 연결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목포 사람들은 외부(특히 서울)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목포가 개항지로 선정된 이유도 바다 뱃길이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목포(양동교회), 익산(남전교회,두동교회) 김제(금산교회), 광주(광주교회), 순천(순천중앙교회)으로 이어지는 전라도 선교를 주도한 것은 군산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이었다. 목포는 남장로교가 전라도 지역에 설치한 5개의 선교부 -전주(1893), 군산(1895), 목포(1898), 광주(1904), 순천(1913) - 중 하나가 되었고 특히 전남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또한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다른 선교부와는 달리 선교사와 한국인이 협력해서 선교부를 시작하고 이끌어 나갔다는 특징이 있다.

 

   벨과 오웬 선교사가 목포에 부임한 것은 189811월 경이다. 벨은 목포 양동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변창연과 함께 함평, 장성, 나주, 광주로 가서 전도를 했고, 의료선교사 오웬은 프렌치 병원을 개설했다. 얼마 후 정명 여학교(1902)와 영흥남학교(1903)가 설립되면서 교회, 병원, 학교로 이어지는 삼각 선교가 완성되었다. 이런 방식은 초기 기독교 선교에서 자주 등장한다. 감리교를 예를 들면 서울 정동 선교는 교회(정동제일교회)와 학교(배재학당, 이화학당), 병원(시병원, 하워드병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목포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으로는 목포양동교회 석조 예배당과 정명 중학교 교내에 있는 석관 1, 2호가 있다.

  목포양동교회(등록문화재 114)1897년 봄, 양동 127번지(현재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임시 장막 안에는 벨목사와 매서인 변창연 조사 그리고 20여 명의 교인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 후 1(1898), 2(1903) 성전을 건축했고, 3번째로 지은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석조 예배당이다.

  예배당 건축은 19103월에 시작해서 1911년 겨울에 완공되었다.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인들은 작정 헌금을 했다. 여자 교인들은 자신의 은가락지와 비녀를 뽑아서 바쳤고 어떤 이는 자신의 집을 팔아서 바쳤다. 바칠 것이 없는 가난한 교인들은 유달산으로 올라가서 주춧돌과 외벽 석재로 쓸 돌을 가져 왔다고 한다.

  교회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4층 높이의 종탑이다. 각 층마다 테두리가 있는 종탑은 대나무처럼 하늘로 우뚝 솟아 있다. 건물 평면은 장방형(직사각형)이다. 처음에는 정사각형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강단 뒤쪽으로 20평 정도 늘려 지으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출입문은 4개가 있다. 남쪽 출입구에 두 개가 있고 동.서쪽에 별도의 문이 있다. . 서에 문이 따로 있는 것은 남녀의 출입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남자 교인들이 드나들던 서쪽 출입문 위 반원형 아치 조각돌에는 한문으로 ‘大韓熙四年’ 이라고 새겨져 있고  隆과 사이에 태극문양이 있다. 여자 교인들이 사용했던 서쪽 출입문 위에는 한글 궁체로 ‘쥬강생일쳔구백십년’이라고 새겨져 있고 태극무늬는 없다. 내부는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에 특별한 점은 없다.

  예배당 남서쪽에 지하실이 있는데, 삼일운동 당시 태극기를 만들었던 장소다. 이곳에서 칼로 목판에 태극문양을 새긴 다음에 한지(韓紙)를 대고 솜방망이를 두들겨서 태극기를 찍어 냈다고 한다. 321일 만세 시위 때는 양동교회 담임 이경필 목사와 교인들, 영흥학교, 정명학교 학생들이 참여 했는데 이경필 목사를 비롯한 200여 명이 체포 되었고 2명의 교인이 죽었다. 서상봉은 일본군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치료받다가 죽었고, 박상술은 체포되어 고문 받아 죽었다.

  신사참배와 관련해서는 담임인 박세연 목사가 죽임을 당했다. 1942830일 주일 예배 때 박세연 목사는 ‘육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로 존경할 수는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박세연 목사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그리고 재림하면 천황도 심판을 받는가? 라고 물을 때 ”하나님이 더 높다. 천황도 심판을 받는다“고 대답했다. 결국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순교(1944.2.15)했다.

 

  정명중학교에는 선교사들이 살았던 건물 두 채가 있는데 학교에서 석관 1, 2호로 부르고 있다. 석관 1(등록문화재 62)1912년 지은 건물로 린턴 부인과 스미스 선교사가 살았던 곳이다. 린턴 부인은 벨 선교사의 딸인데 1899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선교사를 자청했고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린턴 부인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현재 이 건물은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관 2호는 1919년 지은 건물로 해방 전에는 선교사들이, 해방 후에는 교실, 교장실, 행정실로 사용되었다. 19831층 천장에서 많은 독립운동 문건들이 발견된 곳이다. 그 때 발견된 <2.8 독립선언서>원본, <3.1독립선언서> 사본, <警告二千萬同胞> 격문, <朝鮮獨立 光州新聞>, 만세 시위 중에 불렀던 <독립가>사본은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다. 현재 이 건물은 도서관으로 사용중이고, 건물 앞에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구 목포중앙교회(등록문화재 340)는 사찰을 예배당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이 건물은 일본 불교종파인 동원정사의 목포 분원으로 건축 연도는 1920년 대 중반이다. 1957년 목포중앙교회가 이 분원을 구입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2008년 목포시로 되 팔았다.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75도 각도로 가파른 팔작지붕이 건물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특이한 건물 용마루 상단 부분엔 일본 황실 문양인 국화꽃 무늬와 막새 기와를 올렸고, 지붕은 구리 기와로 덮었다. 중앙 현관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13-14C)에 유행했던 가라하후(唐破風, 지붕 처마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솟구쳐 올렸다가 슬며시 내려앉히는 양식)이고, 현관 문 위 상인방에는 파도 무늬를 넣었다.

 

☞주 소

목포양동교회(전남 목포시 양동 127), () 목포중앙교회(전남 목포시 무안동 2-4)

정명중학교(전남 목포시 남양동 86)

 

☞주변 유적지

목포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유적지와 근대 건물들이 몰려있다. 목포근대역사관(전라남도 기념물 174)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개조한 것으로 1920년 경 만든 건물이고, 일본영사관(사적 289)1900년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연도를 알 수없는 일본교회 건물도 남았다.

 

공생원은 1928년 윤치호 전도사가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3,700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윤 전도사는 일제시대에 48번 연행, 구금, 고문을 당할 정도로 투철한 민족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버려진 아이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데 평생을 다 바쳤다. 공생원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민족 사랑을 실천했던 윤치호 전도사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공생원 돌비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내일은 걱정이 없다”

답사일정은 목포양동교회 - 정명중학교 석관1,2- 구 일본 영사관 - 목포근대역사관 - 일본교회 건물 - 구 목포중앙교회(현재 오거리 문화센터) - 공생원(목포시 죽교동 473)

 

 

52. 전남 순천시 순천 선교부 유적

 

1894년 레이놀즈와 드루 선교사가 순천방문, 1905년 교회들 설립, 1906년 순천중앙교회 설립, 1912년 매산학교(구 은성학교) 설립, 1913년 프레스턴과 코잇 가족 부임, 순천 선교부(스테이션) 설치,

 

 선교사들이 순천을 방문한 것은 1894년이다. 그 때는 전주 선교부의 레이놀즈와 드루가 순천을 답사차 찾아 온 것이어서 특별한 전도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순천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904년 광주 선교부가 설치된 다음이다. 광주선교부의 오웬이 보성, 순천, 광양 등지를 순회하면 전도했다. 순천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5년경으로 여천 장천교회, 벌교 무만동교회, 광양 신황리 교회가 이 때 생겼다. 순천읍(순천중앙교회)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6년 이다.

  현재 순천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은 순천기독진료소 건물과 매산 중학교 매산관, 매산여고에 있는 양관 2, 애양원 재활 병원 경내에 양관 3채 등 7개가 남아 있다.

  순천기독진료소 건물(등록문화재 127)은 원래 순천고등성경학교(현재 순천성서신학원) 교사(校舍)였다. 1928년 더럼제일교회의 왓츠 장로가 보낸 7천 달러로 지은 건물이라고 해서 ‘왓츠기념성경학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순천기독진료소는 해방 후 결핵 치료를 위해서 휴 린턴 선교사 가 설립한 것으로 지금은 왓츠기념성경학원 건물을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병원 2층은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산학교는 1912년 교인 자녀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학교이다. 지금은 매산중학교, 고등학교, 매산 여고로 분립되어 있다. 매산중학교 매산관은 1916년 학교 교사(校舍)로 건축되었고 1930년 다시 증축한 석조건물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T자형 건물이다. 매산여고에 있는 2층 석조 건물은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이다. 프레스톤 선교관(등록문화재 126)은 프레스턴 선교사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도서실과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고, 휴린턴기념관은 순천기독진료소를 설립한 휴린턴 선교사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음악실, 미술실, 체육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애양원 재활 병원 경내에는 코잇기념관(전남문화재 자료 259), 순천스테이션외국인학교(등록문화재 124), 더램기념관이 있다. 코잇기념관은 1913년 지은 것으로 순천에 있는 양관 중 가장 오래되었다. 100평 규모의 지하실을 갖춘 2층 석조 건물이다. 매산학교 교장인 코잇 선교사가 살았던 곳이고 지금은 재활병원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다.  

 

  순천스테이션외국인 학교는 1915년 지은 회색 벽돌 단층 건물로 선교사 자녀를 위한 외국인 학교와 외국인 교회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더램기념관은 100평 규모의 지하실을 갖춘 2층 석조 건물이다. 회색 화강암 벽면이고 우진각 지붕 위에 조선식 기와를 얹었다. 원래는 고등성경학교 자리에 있던 것을 1975년 해체해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지금은 여수 애양원 원장 가족이 살고 있다.

 

☞주 소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전남 순천시 매곡동 142-5)

매산중학교(전남 순천시 매곡동 147-6),  매산여고(전남 순천시 매곡동 166-9)  

 

☞주변 유적지(답사일정)

순천중앙교회 -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 - 매산중학교(매산관) - 매산여고(프레스톤, 휴린턴) - 애양원 재활병원(코잇, 순천스테이션외국인학교, 더램)

 

 

53. 전남 여수시 애양원과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1909년 포사이드 선교사가 광주에서 여자 나병환자 치료, 1911년 광주에 나병원 설립, 1926년 광주에 있던 나병원을 여수로 옮김, 1928년 애양병원 건물(현재 애양원 역사관으로 개조), 1935년 현재 애양원 예배당 건축, 1939년 손양원 애양원교회 담임으로 파송, 1948년 여순사건과 손양원 목사 아들 사망, 1950.9 손양원 목사 순교, 1953년 토플하우스 건축

 

  애양원은 1909년 목포에 있던 포사이드 선교사(전주에서 폭행을 당했고 전주서문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와 동일 인물)가 광주로 들어오는 길에 여자 나병(한센병) 환자를 말에 태워서 준데서 시작되었다. 마침 그 모습을 지켜본  광주교회 교인 최흥종이 감동을 받았다. 나병 환자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자 포사이드는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최흥종은 지팡이를 집어주지 못했다. 그날부터 최흥종은 고민했고 ‘서양 의사는 이역만리 남의 땅에 와서 문둥병자도 자기 자식처럼 돌보는데 나는 같은 동족이면서 떨어진 지팡이도 만지지 못했으니 그러고도 내가 조선 사람인가?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천당 가기는 아직 멀었다.’고 자책했다. 나중 일이지만 최흥종은 광주의 나병환자들과 걸인, 결핵 환자들을 위한 삶을 살다 죽었다.(사후에 독립유공자 애족장 표창,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  

  포사이드가 목포로 돌아가고 얼마 후 나병에 걸렸던 여인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서양 사람이 나병환자를 데려다 치료해 주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광주 인근의 나병환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19113칸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서 나병 환자 7명을 수용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다. 나병 환자들이 늘어나서 1924년경엔 수용 환자가 575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광주 사람들이 “광주를 문둥이 소굴로 만들 작정이냐” 며 반발했다.

 

  그 결과 1926년 애양원을 지금 있는 여수로 옮기게 된 것이다. 애양원이 새로 자리 잡은 곳은 ‘애살장’이라고 불렀는데 죽은 아이들을 버리는 곳이었다. 병원을 옮기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여수사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10, 20명씩 조를 짜서 나병환자들을 이주시켰고, 애양원(愛養院)이란 이름은 이곳에 수용된 나병 환자들의 공모를 통해서 선정했다.

  선교사들과 병원 직원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애양원은 나병 환자들의 천국이었다. 같은 시기 소록도 나병원(1916년 설립)이 있었지만 애양원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소록도는 일본 총독부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섬 전체를 철조망으로 둘러싼 수용소였다면, 애양원은 환자들의 천국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한 선교사들과 병원 직원들의 헌신 그리고 환자들의 자립과 자활 심지어 결혼을 시켜서 가정을 이루도록 했던 정책은 소록도 나병원과 비교되는 애양원의 특징이었다.  

  손양원목사와 애양원의 만남은 1936년으로 올라간다.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이었던 손양원이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온 것이다. 말씀과 은혜는 기본이고 마스크와 장갑을 벗고 나병 환자들과 접촉했던 손양원의 모습은 애양원 모든 사람들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때의 기억은 선교사들이 손양원을 애양원 교회 담임으로 부르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손양원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1년 만에 중단되었다. 19409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손양원 목사는 감옥에 들어갔다. 전향을 요구하는 일본인 검사에게 손양원 목사는 “당신에게는 덴꼬(轉向)이 문제지만 내게는 신꼬(信仰)가 문제다”라고 대답했다. 끝내 그는 풀려나지 못했고 해방 후에 석방이 되었다.

  다시 애양원에 돌아왔지만 또 다른 시련을 만났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여수와 순천이 1주일 동안 여수, 순천이 좌익의 손에 넘어갔다. 그 때 순천에서 공부하고 있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좌익에게 학살을 당했다. 두 아들의 장례식 후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죽이는데 동참했던 좌익 학생 안재선의 석방을 주선했고 그를 양자로 받아 들였다. 사람들은 손양원 목사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렀다.

  2년 후 6.25 전쟁이 터졌다. 여수에 인민군이 들어오기 직전,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피난가는 배를 탔던 손양원 목사는 “교회두고 도저히 못가겠소” 하면서 뛰어 내려 애양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체포되었고 10일 후 순교했다.

  애양원에 있는 기독교 유적지로는 애양원 예배당(등록문화재 32)과 애양원역사관(등록문화재 33), 업무 시설인 토플하우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등이 있다.

  애양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화강암 비석 4개로부터 시작된다. 애양원 설립의 계기가 된 포사이드(1926년 건립), 애양원 초대 원장인 윌슨(1926년 건립) 그리고 해방 후 애양원 원장을 지냈던 보이어(1965년 건립)와 토플(1982년 건립)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현재 있는 2층 석조 예배당은 1935년 지은 것이고 예배당 뜰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비가 있다. 애양원역사관은 원래는 병원 건물로 1928년 지은 것이다. 또 하나 오래된 기독교 유적으로 업무시설인 토플하우스(1953년 건축) 정도가 있다.

  예배당에서 바다 쪽으로 가다보면 1993년 개관한 손양원 목사순교기념관과  손양원목사 가족 묘 3기가 있다. 3개의 무덤은 손양원목사 부부와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무덤이다.  

 

 

☞주 소

애양원(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 소록도 중앙교회(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 2)

 

☞주변 유적지(답사일정)

애양원(역대 선교사 기념비, 예배당, 역사관) -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과 가족묘 - 국립소록보 병원과 소록도중앙교회

 

54. 광주시 광주 선교부 유적지

 

1899년 이전에 교회들 설립, 1904.12 벨과 오웬선교사 광주로 옴, 광주 선교부 설치, 1225일 광주교회 설립, 1908년 수피아 여고 설립, 1955년 호남신학대학 설립, 1967년 광주기독간호대학 설립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광주는 무진(武珍) 혹은 무주(武州)로 불렸는데 이는 ‘물둑벌’에서 유래한 말이다. 광주란 지명은 고려 초에 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 하남성에 있는 광주란 지명에서 유래했다. 1896년 전라남도가 신설되고 광주는 새로운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412월 남장로 선교부는 목포에 있던 벨과 오웬, 변창연 등을 광주로 내려 보냈다. 이때부터 전남 선교의 중심은 목포에서 광주가 된다.

  광주에 기독교가 첫 발을 내 디딘 것은 189611월경이다. 군산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광주, 나주 등을 답사했는데 그때 광주에서 초대 관찰사로 부임한 윤웅렬을 만나서 선교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광주에 대한 본격적인 선교는 목포 선교부가 설치되고 부터다. 목포에 부임한 벨과 오웬의 전도로 1899년 이전에 광주에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송정면 우산리교회(광주시 광산구 송정리), 바다등(광주시 광산구 삼도리), 잉게, 하나말, 덕산교회 등이 연이어 세워졌지만 선교 초기에 다 사라져버린 듯하다.

  190412월 벨과 오웬이 광주에 부임했고 광주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225일 양림동 벨 선교사의 사택 사랑방에서 광주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광주교회 역사는 광주제일교회와 3개의 양림교회가 함께 공유하고 있다. 오랜 세월 교회 분립과 교리적인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광주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지는 광주기독간호대학에 있는 오웬기념각, 호남신학대학 경내 윌슨기념관과 선교사 묘역, 수피아여고에 남아 있는 5개의 건물 등이다.

 

  광주기독교간호대학은 남장로교에서 설립한 학교다. 교내에 있는 오웬기념각(광주시 유형문화재 26)은 목포와 광주 선교 개척자인 오웬을 기념해서 1914년 지은 것이다. 오웬은 1898년 한국에 들어 온 의료 선교사였다. 벨 선교사와 함께 목포와 광주에서 활동했다. 19094월 지방 순회전도를 나갔다가 폐렴에 걸려서 죽었다. 기념각은 그가 죽은 후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선교비로 지은 것이다.

  기념각은 정방형의 2층 건물로 강당과 공연장으로 상요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지붕은 조선식 팔작 지붕을 변형한 형태이고 양철지붕 위로 사방 2개씩 8개의 굴뚝을 세웠다. 정문이 두 개인 것은 남녀를 구별하기 위함인데 서쪽 문은 수피아 여고생과 여자들, 북쪽 문은 숭일학교 학생들과 남자들이 드나들었다. 내부 공간은 통간이다.

  오웬기념각에서 호남신학대학으로 가는 길 중간에 광주 시립 사직도서관이 있다. 도서관 아래에 벨 선교사 사택 터임을 알려주는 ‘선교기념비’(1982년 건립)가 있다. 기념비를 지나서 호남신학대학 내로 들어가면 윌슨 선교사 사택(광주시 기념물 15)이 있다. 이 집의 건축 연대는 1908년 혹은 1909년 경으로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 주택이다. 윌슨 주택은 지하실과 다락을 갖춘 2층 벽돌 건물이다. 몇 년전 까지 전남노회 사무실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비어있다.

  학교 운동장을 돌아 언덕 위로 올라가면 선교사 묘지 동산이 있다. 묘지에는 광주에서 활동하다 죽은 선교사들 외에 순천과 목포에서 죽은 선교사들까지 모두 26기가 있다. 묘역은 ‘ㄴ’ 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모서리 쪽에는 광주 선교사들, 서쪽은 순천, 남쪽은 목포 선교사들이 묻혀 있다. 목포 광주 선교를 개척한 벨과 오웬 선교사, 목포 정명여학교 교장이었던 애나벨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묘역 안에는 유일한  한국인 유우선(1956-1983)의 무덤이 있다. 그녀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수영장에서 심장 마비로 죽은 예비 선교사였다. 그녀를 유학 보낸 선교사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서 묻었다고 한다.

  특이한 묘비는 정명여학교 교장 애나벨의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영어가 한 자도 없다. 양림동 선교 묘원에 있는 유일한 한글 비석이다. 그 외 선교사를 만나러 왔다가 죽은 이들도 있다. 채프먼 부인은 조카 휴슨을 만나러 왔다가 죽어 이곳에 묻혔고, 로스 부인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서 이곳에 남았다. 코잇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도 사연은 애처롭다. 세 자녀의 무덤이 있는데 그중 막내 릴리언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수피아 여고는 1908년 벨이 세운 학교로 광주지역 민족운동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 학교다. 삼일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반일회(班日會)와 백청단(白靑團)를 조직해서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반일회는 문화공연을 통한 반일(反日)활동을 펼쳤고, 백청회(백의민족 청년들의 준말)는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학교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벨기념예배당(일명 커티스메모리홀, 등록문화재 159)은 벨 선교사를 기념해서 지은 것으로 건축년도는 1926년경으로 추정된다. 예배당은 지하실을 갖춘 단층 건물이고 고딕식이다. 처음부터 양림동에 살던 선교사들의 예배처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수피아여고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수피아 홀(1911년 건축, 등록문화재 158)은 미국의 스턴스 부인이 죽은 자신의 동생 스피어(Speer)를 기념해서 남장로교 선교부에 보낸 헌금으로 지은 학교 교사(校舍)이다. 회벽 벽돌로 쌓아 올린 2층 건물로 평면은  라틴십자가 형태이다. 수피아 여학교(Ja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란 학교명도 스피어(Speer)에서 나온 말이다. 현재 수피아 홀 은 역사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100주년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윈스보로 홀(등록문화재 370)1927년 건립된 수피아 교사(校舍)이다. 총독부 지정학교로 인가받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고, 건축비는 미국 남장로교 여성들이 1927년 ‘생일감사헌금’을 모아서 보내준 것으로 충당했다. 그리고 헌금을 모금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윈스보로 부인을 기념해서 윈스보로 홀로 했다. 지하 1, 지상 2층으로 화강암 기초 위에 세워진 붉은 벽돌을 쌓았고, 보일러 시설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당시로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이 외에 두 채의 건물이 있다. 미국교회에서 보내준 ‘생일감사헌금’ 59,000달러로 윈스보로 홀을 짓고 남은 돈으로 지은 별관(1935년 준공)과 소강당(1932년 준공)이 남아 있다.

 

☞주 소

광주기독간호대학(광주시 남구 양림동 67), 호남신학대학(광주시 남구 양림동 108), 수피아 여고(광주시 남구 양림동 256), 국립 5.18묘지(광주시 북구 문정동 산34)

 

☞주변 유적지(답사일정)

오웬기념각 - 선교기념비(벨선교사 사택 터) - 호남신학대학(윌슨선교사 사택, 선교사 묘원) - 수피아여고(벨기념에배당, 수피아홀, 윈스보로홀, 별관, 소강당) - 국립5.18 묘지

 

55. 그밖의 기독교 유적지

 

1) 전북 군산시

  구암교회(군산시 구암동 358-6)1900년 설립되었다. 군산 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이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은 1896년 봄부터 이지만,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1900년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석조 예배당(1959년 건축)을 ‘군산 삼일운동기념관’으로 개조해서 삼일운동 당시의 태극기 목판과 재판 기록 그리고 독립군들 사용했던 소총과 배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예배당 앞에는 ‘군산 3.1독립운동사적지’, ‘호남선교 100주년기념성역지’, ‘군산 3.1운동 기념비’ 등이 있다.    

 

2) 전북 정읍시

  두암교회(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316)의 설립 연도는 알 수없다. 육이오 때 23명의 교인들이 인민군에게 학살당했고 교회 내에 23일 순교자 합장묘와 순교비가 있다.

 

 

3)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영광군 염산면 541-1)1908년 벨 선교사가 설립했다. 6.25 때 교인 65명 전원이 인민군에게 학살당했다. 교회 입구에 순교기념탑과 기념조형물이 있고, 예배당 옆에 기독교인순교기념관이 있다.

  염산교회(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191)1939년 설립되었고 육이오 때 교인 77명이 순교했다. 교회 입구에 순교자들을 합장한 큰 봉분과 순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2층 건물에 350평 규모의 순교체험관이 있고, 해안가에 영광지역 순교자(염산, 야월교회 교인 포함)를 기리는 기독교인순교탑이 있다.

 

4) 전남 무안군

  해제교회(무안군 해제면 신정리 7-3)1932년 레이놀즈와 드루 선교사가 설립했다. 육이오 때 김대업 전도사, 임인재 장로, 황인경, 김판업, 홍순용 집사가 순교했다.

  용학교회(무안군 해제면 용학리 6)는 육이오 때 16명의 교인이 순교했다. 전통 한옥 형태의 예배당이 독특하다.

 

5) 전남 영암군

  구림교회(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301)는 육이오 때 전교인 18명이 순교했다.

  상월교회(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25)1947년 설립되었고 6.25 때 교인 26명이 순교했다.

  천혜교회(영암군 학산면 용소리 500)는 육이오 때 10명이 순교했다.

 

6) 전남 구례군

  지리산 선교사 유적지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여름 휴양지였다. 노고단과 왕시루봉에 유적이 남아 있다. 노고단 유적은 일제 강점기에 마련한 휴양시설로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반면에 왕시루봉(구례군 토지면 구산리 산 106) 휴양지는 1962년부터 개발된 것으로 선교사 주택들과 교회가 남아 있다.

 

7) 전남 신안군

  증동리교회(신안군 증도면 중동리 130-4)1933년 문준경 전도사(1891-1950)가 세운 교회이고 문 전도사가 순교할 때까지 목회했던 곳이다. 증도에는 다른 종교 건물은 전혀 없고 교회만 11군데이다. 또한 섬 인구 2,200명 중 90%가 예수를 믿고 있다. 증도가 복음화 된 데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열심 있는 전도가 절대적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는지 1년에 아홉 켤레의 고무신을 바꿔 신었다고 한다. 그 결과 증동리교회를 포함해서 1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목포 경찰서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6.25 때 인민군에게 글려가서 총살당했다.  

  신안군 여러 섬에 교회를 세웠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경찰,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에 맞서 싸웠던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는 200912CBS 창사 55주년 특집 2부작 ‘시루섬’(증도의 옛 이름) 으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현재 증동리 교회에 문전도사의 추모비가 있고, 증동리 교회 앞바다(순교 현장)에 순교기념비와 묘소가 있다.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이 곧 완공될 예정이다.

 

 

8 장 제주도

 

1908년 북장로교 이기풍 목사 파송, 금성교회 설립, 1909년 조천교회 설립, 남장로교 프레스톤과 벨 선교사가 방문, 1910년 성내교회 설립, 1948년 대정교회 이도종 목사 순교, 1952년 강병대교회 설립.건축

 

 

  제주도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이고 ‘섬나라’란 뜻이다. 그러다가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탐라(耽羅)로 불리게 되는데 공식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의 탐라 정벌)에 등장한다.(이보다 더 오래된 문헌 기록은 중국인 진수(AD233-297)가 쓴 ‘삼국지’ 위지동이전으로 그 책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을 ‘주호’(州胡)로 칭하고 있다.) 고려 숙종 때(1105) 탐라국은 없어지고 중앙관리가 직접 다스리는 탐라군으로 격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전라도에 속한 제주목으로 편제되었고 1629년부터는 ‘출륙금지령(제주도 사람은 육지로 이주하여 정착할 수 없도록 한 제도)이 시행되면서 외부와 고립된 지역이 되었다.

  제주도 선교는 1908년 북장로교 이기풍 목사로 부터 시작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1907년 첫 목사 안수(감리교는 19015월 상동교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목사안수 받음)를 받은 7명 중 한 사람이다. 1908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파송 예배를 마친 이기풍 목사는 목포에서 두 달간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다가 제주도로 들어 왔다.

  이기풍 목사의 적극적인 전도로 금성교회(1908), 조천교회(1909), 성내교회(1910) 등이 설립되었다. 현재 제주에 있는 기독교 유적지로는 금성교회, 대정교회, 강병대교회, 이기풍 선교기념관 등이 있다. 금성교회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경신학교(언더우드가 설립) 출신인 조봉호에 집에서 시작했다. 조봉호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냄 혐의로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모진 고문을 받고 1920년 순국했다. 1994년 지은 새 예배당 옆에 구 예배당이 있다.  구 예배당은 1923년 지었고 1973년 증축한 건물이다. 이 교회 출신 이도정은 제주 출신 첫 목회자였고 1948년 무장공비에게 살해되었다.

  대정교회는 이도정 목사가 담임했던 교회이다. 제주 4.3 사건이 한창이던 19485월 이도정 목사는 화순교회로 예배드리러 가다가 무장 공비에게 잡혔다. 공비로 부터 “공산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협박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고 생매장 당해 순교했다. 교회 앞에 ‘목사이도정기념비’(1956년 건립)가 있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조회
  • 1
  •  한국기독교유적지 순례 안내3 (경상도,전라도.제주도)
  • 2018-04-01
  • 석광훈
  • 5329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